Thursday, January 30, 2020

[정민의 세설신어] [112] 교자이의(敎子以義)

[정민의 세설신어] [112] 교자이의(敎子以義) [정정내용 있음]
전문가칼럼
입력 2011.06.30 23:11 | 수정 2011.07.05 10:37
호조판서 김좌명(金佐明)이 하인 최술(崔戌)을 서리로 임명해 중요한 자리를 맡겼다. 얼마 후 과부인 어머니가 찾아와 그 직책을 떨궈 다른 자리로 옮겨달라고 청했다. 이유를 묻자 어머니가 대답했다. "가난해 끼니를 잇지 못하다가 대감의 은덕으로 밥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중요한 직책을 맡자 부자가 사위로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처가에서 뱅엇국을 먹으며 맛이 없어 못 먹겠다고 합니다. 열흘 만에 사치한 마음이 이 같으니 재물을 관리하는 직무에 오래 있으면 큰 죄를 범하고 말 것입니다. 외아들이 벌 받는 것을 그저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일을 시키시면서 쌀 몇 말만 내려주어 굶지 않게만 해주십시오." 김좌명이 기특하게 여겨 그대로 해주었다. '일사유사(逸士遺事)'에 나온다.
정승 남재(南在)의 손자 남지(南智)가 음덕으로 감찰이 되었다. 퇴근하면 할아버지가 그날 있었던 일을 자세히 물었다. "오늘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급 관리가 창고에서 비단을 슬쩍 품고 나오기에 다시 들어가게 했습니다. 세 번을 그랬더니 그제야 눈치를 채고 비단을 두고 나왔습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너같이 어린 것이 관리가 되었기에 매번 물어 득실을 알려 했던 것인데, 이제 묻지 않아도 되겠다."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에 있다.

자식이 윗사람에게 잘 보여 월급 많이 받는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녀도 시원찮은데, 자식의 마음이 그새 교만해진 것을 보고 어미가 나서서 그 자리를 물려주기를 청했다. 어린 손자가 못 미더워 날마다 점검하던 할아버지는 손자의 심지가 깊은 것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어미는 자식이 죄짓게 될까 걱정했고, 할아버지는 손자가 집안과 나라에 누를 끼칠 것을 염려했다.

자식을 올바른 길로 가르치기(敎子以義)가 쉽지 않다. 잘못을 저질러 혼이라도 나면 부모가 학교로 찾아가 선생을 폭행하고 난동을 부린다. 떼돈 번 부모는 수억원짜리 스포츠카를 사주고, 자식은 그 차를 몰고 나가 남의 목숨을 담보로 도심에서 광란의 질주를 벌인다. 발 좀 치우라고 했다고 지하철에서 20대가 80대 노인에게 쌍욕을 해댄다. 눈에 뵈는 게 없다. 무슨 이런 세상이 있는가. 이렇게 막 자라 제 몸을 망치고, 제 집안을 말아먹고, 나라에 독을 끼친다. 밖에서 하는 행동거지를 보면 그 부모가 훤히 다 보인다.

♣ 바로잡습니다
▲1일자 A30면 '정민의 世說新語(세설신어)' 중 '남지(南地)'는 '남지(南智)'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습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6/30/2011063002472.html

[정민의 세설신어] [122] 맹인할마(盲人瞎馬)

[정민의 세설신어] [122] 맹인할마(盲人瞎馬)
전문가칼럼
입력 2011.09.08 23:06 | 수정 2011.09.19 09:46
두 해 전 연암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현장을 보러 밀운현(密雲縣) 구도하진(九渡河鎭)을 물어물어 찾은 적이 있다. 하룻밤에 아홉 번 황하를 건넜다길래 잔뜩 기대하고 갔더니 고작 폭이 20~30m 남짓한 구불구불 이어진 하천이어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연암의 허풍에 깜빡 속았다. 하천을 끼고 난 도로로는 1도(渡)에서 9도까지 10여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때는 길이 없었을 테니 굽은 물길을 따라 몇 차례쯤 물을 건넜겠는데, 아홉 번은 아무래도 풍이 심했다.
캄캄한 밤중에 강을 건널 때 물이 말의 배 위로 차오르다가 말의 발이 허공에 매달리기도 하니, 자칫 굴러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왜 없었겠는가? 간신히 강을 건너자 누가 말했다. "옛날에 위태로운 말에 '소경이 애꾸눈 말을 타고서, 한밤중에 깊은 못가에 섰네(盲人騎瞎馬, 夜半臨深池)'라고 했다던데, 오늘 밤 우리가 꼭 그 짝입니다그려." 연암이 대답한다. "위태롭긴 하네만, 위태로움에 대해 잘 안 것은 아니로군!" "어째 그렇습니까?" "눈이 있는 자가 소경을 지켜보며 위태롭다 여기는 것이지, 소경 자신은 보이질 않아 위태로울 것이 하나도 없네."

두려움과 위태로움은 눈과 귀가 만든다. 연암은 소경의 비유를 즐겨 말했다. 소경이 지나는 것을 보고는 "저야말로 평등안(平等眼)을 지녔구나!"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우리는 자주 멀쩡히 뜬 두 눈 때문에 외물에 정신이 팔려 공연한 걱정을 만들고, 쓸데없는 위태로움을 자초한다.

몇이 모여 위태로움에 관한 말 짓기 시합을 했다. 환남군(桓南郡)이 운을 뗐다. "창끝으로 쌀을 일어 칼 끝으로 불 땐다.(矛頭淅米劍頭炊)" 은중감(殷仲堪)이 맞받았다. "백살 먹은 노인이 마른 가지 오르네.(百歲老翁攀枯枝)" 고개지(顧愷之)가 거들었다. "우물 위 두레박에 갓난아이 누웠구나.(井上轆轤臥嬰兒)" 막상막하였다. 그때 곁에 있던 은중감의 부하가 불쑥 끼어들어 했다는 말이 위에 인용한 구절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송나라 유의경이 지은 책에 나온다. 세상에 위태로운 것이 어디 이뿐이랴! 눈을 떠서 위태로움을 만들 것인가? 눈이 멀어 위험을 자초할 것인가? 이것도 저것도 참 어렵다.

♣ 바로잡습니다
▲9일자 A34면 '정민의 世說新語' 중 "한나라 때 유향(劉向)의 '세설신어'"는 중국 남북조시대 송나라 유의경이 지은 책으로 바로잡습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08/201109080246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