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정민의 세설신어.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정민의 세설신어. Show all posts

Friday, January 13, 2012

[정민의 세설신어] [140] 체구망욕(體垢忘浴)

권소운(權巢雲)이 이학규(李學逵· 1770~1835)를 찾아와 자신의 거처 관묘당(觀妙堂)을 위한 기문을 청했다. 그는 40년간 과거에 응시하다가 만년에 포기했다. 머리맡에 당송 고시 한두 권을 놓아두고 자다 일어나 펼쳐지는 대로 몇 수씩 읽곤 했다. 취하면 두보의 '취가행(醉歌行)'을 소리 높여 불렀다.

집 이름의 연유를 묻자, 그가 대답한다. "사물의 이치는 깨달으면 묘하고, 묘하면 즐겁지요. 천기(天機)는 날마다 새롭고, 영경(靈境)이 나날이 펼쳐집니다. 묘함을 깨달을수록 보는 것이 점점 묘해집디다. 그래서 관묘당이라오."

대답을 들은 이학규가 벌떡 일어나 그에게 절을 한다. "선생은 깨달으셨구려. 예전 선생이 갓 과거를 포기했을 때, 다른 사람의 급제 소식을 들으면 낯빛이 흔들리고 마음으로 선망함을 면치 못했었소. 이제 바깥과의 교유를 끊고 참되고 질박함으로 돌아와 남은 해를 자연에 의탁하니, 이것은 선생께서 지금 세상에 대해 이미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이오. 선생은 초저녁에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머리털이 엉망이어도 빗질하지 않고(髮亂而忘櫛), 몸에 때가 있어도 목욕하지 않으면서(體垢而忘浴), 편안히 소요하며 자족하시는구려. 둥지의 참새가 새끼를 치고, 나방이 변화하는 것 모두가 선생의 관묘(觀妙)를 열어주기에 넉넉하오. 자식과 며느리가 나물국에 술을 내오니, 이 또한 선생의 관묘를 보좌하기에 충분하구려. 쩝쩝! 부럽소."

해구상욕(骸垢想浴)은 "천자문"의 한 구절이다. 몸에 때가 끼면 목욕할 것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몸이 더러워지면 목욕 생각이 간절하다. 그런데 권소운은 더러워도 씻지 않고, 봉두난발(蓬頭亂髮)이어도 머리 빗을 생각을 않는다. 가난한 살림에 술 한 잔 걸친 후 사물을 깊이 응시한다. 그러자 지난 40년간 벼슬길을 향한 전전긍긍을 놓지 못했을 때는 알지 못했던 깨달음이 사물들 안에서 일어나 날마다 영경(靈境)이 눈앞에 환하게 펼쳐지더라는 것이다.

세상이 온통 진흙탕이다.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하자고 씻는 물이 또 구정물이다. 씻어본들 뭣하나. 금세 더 더러워진다. 머리를 빗은들 무슨 소용인가. 이가 그대로 바글댄다. 그 꼴을 보고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준엄하게 나무란다. 같은 국에 만 밥이다. 바랄 걸 바라야지. 백년하청(百年河淸)!

[정민의 세설신어] [139] 자지자기(自止自棄)

노수신(盧守愼·1515~1590)이 임금에게 먼저 뜻을 세울 것을 청한 '청선입지소(請先立志疏)'의 한 대목. "대저 뜻이란 기운을 통솔하는 장수입니다. 뜻이 있는 곳이면 기운이 반드시 함께 옵니다. 발분하여 용맹을 다하고, 신속하게 떨쳐 일어나는 것은 힘을 쏟아야 할 곳이 있습니다. 산에 오르면서 꼭대기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스스로 그치는 것[自止]이 됩니다. 우물을 파면서 샘물이 솟는 것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스스로 포기하는 것[自棄]이 됩니다. 하물며 성현과 대덕(大德)이 되려면서 뜻을 세우지 않고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등산은 정상에 오를 목표를 세우고 차근차근 밟아 올라간다. 우물은 차고 단물을 얻을 때까지 파고 또 판다. 파다 만 우물은 쓸데가 없고, 오르다 만 산은 가지 않은 것과 같다. 목표를 정해 큰일을 도모할 때는 심지를 깊게 하고 뜻을 높이 세워야 한다. 뜻이 굳지 않으면 제풀에 그만두고 제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自止自棄). 목표를 향해 밀어붙이는 힘은 굳센 뜻에서 나온다. 굳센 뜻이 없이는 추진하는 에너지가 생겨날 데가 없다.

하수일(河受一·1553~1612)은 젊은 시절 두 동생과 함께 청암사(靑巖寺)에서 글을 읽다가 절 뒷산에 올랐다.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그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사군자는 몸둘 곳을 마땅히 가려야 한다. 낮은 곳에 처하면 식견이 낮아지고, 높은 곳에 처하면 식견이 높아진다. 높지 않은 곳을 택한 대서야 어찌 지혜를 얻으리(士君子處身宜擇, 處下而見下, 處高而見高. 擇不處高, 焉得智)." 꼭대기에서는 시야가 툭 터져서 안 보이는 것이 없었는데, 내려올수록 시야가 좁아져서 답답해졌기에 한 말이다.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말했다. "등산을 하면서 산꼭대기까지 가려고 마음먹은 사람은 비록 꼭대기까지 못 가더라도 산허리까지는 갈 수가 있다. 만약 산허리까지만 가려고 작정한다면 산 밑바닥을 채 벗어나지도 않은 채로 반드시 그치고 말 것이다(登山期至山頂者, 雖不至頂, 可至山腰矣. 若期至山腰, 則不離山底而必止矣)."

품은 뜻이 그 사람의 그릇을 가른다. 바라보는 높이에 따라 뿜어져나오는 에너지의 양도 차이 난다. 제 깜냥도 모르고 날뛰는 것은 문제지만, 해보지도 않고 자포자기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Tuesday, December 27, 2011

[정민의 세설신어] [137] 설니홍조(雪泥鴻爪)


송나라 때 소식(蘇軾)이 아우 소철(蘇轍)에게 화답한 시는 이렇다. "인생길 이르는 곳 무엇과 비슷한가. 기러기가 눈 진흙을 밟는 것과 흡사하네. 진흙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았어도, 날아가면 어이 다시 동서를 헤아리랴. 노승은 이미 죽어 새 탑이 되어 섰고, 벽 무너져 전에 쓴 시 찾아볼 길이 없네. 지난날 험하던 길 여태 기억나는가? 길은 멀고 사람 지쳐 노새마저 울어댔지.(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老僧已死成新塔,壞壁無由見舊題. 往日崎嶇君記否, 路長人困蹇驢嘶.)"

시의 뜻은 이렇다. 사람의 한 생은 기러기가 눈 쌓인 진흙밭에 잠깐 내려앉아 발자국을 남기는 것과 같다. 기러기는 다시금 후루룩 날아갔다. 어디로 갔는가? 알 수가 없다. 예전 우리 형제가 이곳을 지나다가 함께 묵은 일이 있었다. 그때 우리를 맞아주던 노승은 그 사이에 세상을 떠나 새 탑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예전 절집 벽에 적어둔 시는 벽이 다 무너져 이제 와 찾을 길이 없다. 분명히 내 손으로 적었건만 무너진 벽과 함께 흙으로 돌아갔다. 노승은 육신을 허물고 탑 속으로 들어갔다. 틀림없이 있었지만 어디에도 없다. 여보게 아우님! 그 가파르던 산길을 기억하는가? 길은 끝없이 길고, 사람은 지쳤는데, 절룩거리는 노새마저 배가 고프다며 울어대던 그 길 말일세. 이제 그 기억만 남았네. 그 안타깝던 마음만 이렇게 남았네.

설니홍조(雪泥鴻爪)란 말이 이 시에서 나왔다. 눈 진흙 위의 기러기 발자국이란 말이다. 분명히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자취만 남고 실체는 없다. 한 해를 바쁘게 달려왔다. 일생을 숨 가쁘게 살아왔다. 여기저기 어지러이 뒤섞인 발자국 속에는 내 것도 있겠지. 아웅다웅 옥신각신 다투며 살았다. 한번 밀리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사생결단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보니 덧없다. 발자국만 남기고 기러기는 어디 갔나?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들이 오늘도 '사는 해 백년을 못 채우면서, 언제나 천년 근심 지닌 채 산다(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

90대 노부부는 세밑의 구세군 냄비에 2억원을 넣고 자취를 감췄다. 천년만년 절대 권력을 누릴 것 같던 독재자는 심근경색으로 돌연히 세상을 떴다. 누구나 죽는데 그것을 모른다. 자취가 남은들 어디서 찾는가? 눈이 녹으면 그 자취마저 찾을 길이 없으리.